November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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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색173
개인의 삶이란 분류되지 않거나, 분류되지 못하는 영역들이 있다. 기타의 영역이며, 미지(未知)의 영역이기도 하고, 무지(無知)의 영역이기도 하다. 그것은 열정적인 사람들이 끊임없이 인생을 논의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지친 사람들이 절대적인 존재나 의견들에 자신을 의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Posted via email from 길 위의 바람 | Comment »
Nov 8th
본색172
인간의 위대함은 스스로의 규칙을 만드는 능력에 있다. 내적으로는 도덕률이요, 외적으로는 법규범이다. 인간의 사악함은 자신이 만든 규칙도 헌신짝처럼 내팽겨치는데 있다. 내적으로는 일탈이요, 외적으로는 반항이다. 그런 위대함과 사악함으로 한 인간이 구성되어 있다. Posted via email from 길 위의 바람 | Comment »
Nov 3rd
October 2011
2 posts
본색171
존재의 시작과 끝도 모르고, 자의에 의하든, 타의에 의하든, 영혼에 올가미를 쓰고, 씌우는 모든 인식은 불순하다. Posted via email from 길 위의 바람 | Comment »
Oct 19th
본색170
두 개의 철길이 침목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어떤 기차도 그 위로 달릴 수 없다. Posted via email from 길 위의 바람 | Comment »
Oct 8th
September 2011
5 posts
본색169
자유의 본질은 모든 형식의 동행, 정의의 본질은 절차 참여의 확대, 진리의 본질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의 존중 Posted via email from 길 위의 바람 | Comment »
Sep 27th
본색168
‎’바보’들은 자신들이 뿌린 씨앗을 거두지 못하고, ‘위대한 바보’들은 제대로 씨를 뿌리지도 못하지만, 분명한건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누군가는 그 꽃을 피우게 할 것이다. 그런 희망을 남겨둔 이른바 ‘바보’들의 존재에 감사한다. Posted via email from 길 위의 바람 | Comment »
Sep 20th
본색167
‘육신의 존재’든, ‘영혼의 인식’이든 결국엔 소멸한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에는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더라도, 후자의 경우는 새로운 종자(種子)로 남는 것 같다. 그래서 어떤 종교에서는 ‘밀알’을 이야기 하고, 또 어떤 종교에서는 ‘식(識)’을 이야기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돌고 도는 것이라면 과연 이 세상에 새로운 것이라고는 어떤 것인지 궁금해진다. 어쩌면 ‘창조’란 아마도 ‘인식의 기만’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Posted via email from 길 위의 바람 | Comment »
Sep 17th
본색166
선택하는 자와 선택되는 자, 그 간격 만큼의 정의(正義) Posted via email from 길 위의 바람 | Comment »
Sep 16th
본색165
천년의 길과 한순간이 무너지는데 걸리는 시간은 찰나! Posted via email from 길 위의 바람 | Comment »
Sep 16th
May 2011
4 posts
본색164
속이는 자와 속는 자, 그 간격 만큼의 욕망 Posted via email from 길 위의 바람 | Comment »
May 11th
본색163
집을 짓는 자와 부수는 자, 그 간격 만큼의 권력 Posted via email from 길 위의 바람 | Comment »
May 11th
본색162
나를 정의하는 것은 나의 계곡이다. Posted via email from 길 위의 바람 | Comment »
May 6th
본색161
그런 믿음을 가져보지 못한 사람들이 어찌 그런 행동을 다 이해할 수 있을까. 존재의 인식 한계를 넘어선 이후는 바로 윤회(부활)의 세계가 아니겠는가. 침묵하고 있는 천지(天地)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 웃고 있다. 아니 차라리 그냥 내버려 두라고 충고하고 있다. Posted via email from 길 위의 바람 | Comment »
May 6th
February 2011
4 posts
본색160
한때는 내가 없어도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과 세상으로 인해 다소 서운하기도 했었지만, 지나고 보니 내가 없어도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과 세상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싶기도 하다. Posted via email from 길 위의 바람 | Comment »
Feb 26th
본색159
봄은 늘상 속으면서도 또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농부의 설렘과 함께 오고, 가을은 남는 것 없어도 감사할 줄 아는 허수아비춤만으로도 풍요로운 그들의 거룩함과 함께 간다. 그렇게 오고 가는 삶들이 있어 뭇 생명들은 또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가 보다. 삶이란 결국 이익이 남지 않는 장사일 수 밖에 없지만, 늘 발버둥치는 환상 속에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속을 지혜로써 일찍 깨닫는다고 한들 죽지않고 살아있는 마당에 그런 거래를 중단할 수 있을 것인가. 오직 살아서 가능한 바른 행동만이 더 솔직한 깨달음일 것이다. Posted via email from 길 위의 바람 | Comment »
Feb 26th
본색158
가려진 잎들이 문득 사라져 버리고, 감춰진 것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 밖에 없는 어느 순간에는 누군가의 심판도 결코 피해 갈 수는 없을 것이다. 벌거벗은 채로달리 피할 방도도 없이 그 붉은 속과 마주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이 어쩌면 부지불식 중이라도 서로가 쉽게 고백하지 못하는 가장 바라던 진실에 가까운 순간이 아닐까 싶다. 의도하지 않은 결과라 할지라도 이젠 더이상 숨길 수 없으므로 드러날 수 밖에 없는 사실들을 가리고 있는 검은 잎들을 하나씩 지워가는 것, 그것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하는 것이고, 또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하는 것들이리라. Posted via email from 길 위의 바람 | Comment »
Feb 26th
본색157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경계하고 서둘러 깨우쳐야 할 일은 바로 자신의 무지일 것이다. 욕망과 집착의 어리석음이 모든 고통의 씨앗임을 아는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 씨앗을 뿌리고 있는 주범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오히려 죄악에 가깝다. 그래서 모든 기도의 시작이 바로 참회일런지도 모르겠다. Posted via email from 길 위의 바람 | Comment »
Feb 5th
January 2011
3 posts
본색156
사람이 사상보다 앞선다. 사상이란 사람을 이해하거나 사람의 행동양식의 방향을 결정하는 지표로서의 성격을 갖는 관문에 불과하다. “부자가 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만 부자로 죽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는 것이 바로 사상보다 앞서는 ‘사람의 증명’이 아니겠는가 싶다. 특히나 보수적인 사상적 성향의 사람들로부터의 이와 같은 선언은 사유재산제도의 중요한 한 부분인 ‘상속의 포기’로서 신선한 혁명에 다름 아니다. 이런 바람(風)들이 사상의 본색을 넘어서 여러 곳에서 다양하게 불어올수록 ‘사람사는 세상’에서의 골은 더욱 얕게 될 것이다. 망망대해의 어둠에서 뭍으로 이끄는 한줄기 빛이 있다면 모두가 그 곳으로 향하듯이 요즘...
Jan 8th
본색155
기술과 제도는 대개 순기능과 역기능을 함께 갖는다. 요즘의 대세인 소셜네트워크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소외를 극복하는 소통의 수단이 될 수 있음과 동시에 새로운 소외의 도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리라. 망의 중립성과 보편적 접근권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또 하나의 고통의 씨앗에 불과할 것이다. 일상 생할에 필수적인 요소로서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이미 그것은 공공재다. 권력과 자본의 밑밥을 통제할 수 있고, 많은 대중들이 자유로이 활개를 칠 수 있는 그물을 짜는 일은  과연 누구의 몫일까? 누군가에게 그 일을 맡긴다면 어떤 그물을 짤 사람들에게 위임을 해야할까? 모든 선거에서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행사하여야 하는 한표의 또 다른 의미이다. Posted via email from 길 위의...
Jan 8th
본색154
육신의 몸이 살아서 깨달음을 말하는 것은 대부분 거짓이다. 육신의 몸이 죽어야만이 아마 절반의 진실일 것이다. 육신의 몸이 살아서 돌아보는 이유는 사후 영혼들의 안식을 위한 준비이며, 그러한 인과의 연을 끊어내어 오래도록 평화롭기 위함일지도 모르겠다. 미리 알아차리지 않으면 영혼도 습관이 있어 그에 따라 움직이려 하므로 내내 조용하질 못할 것이다. 참회와 기도는 그러한 잘못된 습관들을 미리 알아차려 준비하게 하는 기술을 순화하고 체득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죽어서도 죽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자들에게는 죽음조차 가소로운 일이므로 그들에게 두려운 것은 없으리라. 다만, 의지와 상관없이 좌우되는 일들에 대한 다소간의 염려가 있을 뿐, 자신을 제외한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 그러니 원망의 대상을 파괴하지...
Jan 8th
December 2010
6 posts
본색153
‘배려’라는 것은 ‘간격의 유지’다. 운전을 할 경우엔 다름아닌 전후좌우의 차간 거리를 살피는 것이다. 그 것은 스스로 안전하기 위함이요, 동시에 남을 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배려’라는 것은 나를 지키는 일이요 더불어 남을 나와 함께 존재하게 하는 동행의 기술이다. Posted via email from 길 위의 바람 | Comment »
Dec 18th
본색152
생각함으로써 고통이 존재한다. 고통을 알기 위한 생각들을 한다. 생각으로써 고통의  장애들을 걷어 낸다.  생각을 놓는 생각들. Posted via email from 길 위의 바람 | Comment »
Dec 18th
본색151
솔직함이란 알면 아는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고, 모르면 모르는대로 알아가는 일들일 것이다. 모험도 때로는 필요한 일이겠지만, 무모함은 오히려 어리석음에 가깝다. 어리석음이 짓고 있는 위업(僞業)들을 살피는 것이 바로 지혜가 아닐까 싶다. 늦지 않은 알아차림이 다름아닌 구원일 것이리라. Posted via email from 길 위의 바람 | Comment »
Dec 18th
본색150
존재는 사실을 말하고, 인식은 자유의 몫이다. 존재가 인식을 결정한다는 것은 인간의 삶에 대한 절반의 설명이며, 나머지 절반은 반대로 인식이 존재를 결정하는 것일 것이다. 전자는 주로 욕망의 작용 영역이라면, 후자는 주로 양심의 반작용 영역이리라. 양자를 포함하여 인간의 이중적 본성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싶다. 현상으로서의 삶이란 존재가 인식을 선택하는 구속으로부터 인식이 존재의 자유를 선택하는 그만큼의 보폭으로 서두르는 길 위에 있는 것은 아닐까. 나, 너 그리고 우리라는 것은 흐르는 강물을 사이에 두고 강의 이편과 저편으로 서로 마주보고 갈등하지만, 궁극으로는 하나의 바다에 둘러쌓인 고독한 대지의 동행들일 것이다. 따라서 강을 건너기 위해 지금 뗏목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만 결국엔 그 뗏목조차...
Dec 11th
연습47
2010년 12월 10일 오후 4시 서울 중구 명동 서울 YWCA 강당에서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서울대공익인권법센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이 고(故) 조영래 변호사 20주기 추모행사를 열었다고 전한다. ‘전태일평전’의 저자이기도 한 조영래 변호사는 1980년대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다 1990년 43세의 젊은 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1947년 대구에서 태어난 조 변호사는 경기고등학교 3학년 때 한일회담반대 시위를 주도하다 정학 처분을 당했고, 서울대 법대에 수석으로 진학한 후에도 삼성재벌밀수규탄, 6・8부정선거규탄, 3선개헌반대 등 학생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재학 중인 1971년 13회 사법시험에 합격했지만, 여러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수배와 투옥을 겪은 뒤, ‘서울의...
Dec 11th
연습46
흔히 ‘실천하는 지성’의 대표로 불려 온 진보적 언론인이자 언론학자이며, 사회운동가였던 리영희(李泳禧) 전 한양대 교수가 2010년 12월 5일 새벽 0시 40분쯤 향년 81세로 별세했다. 1929년 평북 삭주에서 태어나 한국해양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57년부터 합동통신에서 기자로 일했고, 1964년 유엔의 남북한 동시 초청을 기사화하여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기도 했으며, 1969년 베트남 전쟁 파병 비판기사를 썼다가 조선일보에서 쫓겨났고, 1971년 ‘군부독재ㆍ학원탄압 반대 64인 지식인 선언’ 참여로 합동통신에서 해직됐다. 1980년 신군부가 ‘광주소요 배후 조종자’ 중 한 명으로 그를 지목, 투옥했을 때 프랑스 일간지...
Dec 4th
November 2010
11 posts
본색149
불과 언어와 도구의 사용으로 ‘만물의 영장[靈長]‘이 된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는 인간이 만들어낸 생활속의 도구들을 통해서도 알아차릴 수 있는 면이 있다. 간단한 일례로 자동차의 구조를 보더라도 자동차는 편리한 이동수단에 대한 인간 욕망의 산물이지만, 그 내면에는 속도를 내는 액셀과 속도를 줄이는 브레이크를 동시에 장착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탐욕으로 질주하더라도 일정한 욕망의 수준을 넘어서게 되면 그 탐욕을 제어하고자 하는 기제가 인간의 본성에 처음부터 내재되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것이 선이든 악이든 상관없이 태생적으로 ‘이기적인 동시에 이타적인 심성의 존재’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기적이고, 이타적이란 용어도 ‘존재의...
Nov 27th
연습45
싸움에도 예외없이 기술과 준비가 필요할 것이다. 이 땅에서는 휴전 이후 한시도 긴장을 풀 수 없는 상호 대치상태에서 지금까지 서로 많은 비용과 희생을 감내하면서 싸움에 대한 준비를 해왔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술도 발전하여 싸움의 형태도 다양하게 변모하고 있는 실정이며, 북한의 핵개발의 의욕은 여전한 듯하다. 배후가 의심되는 해커들에 의한 사이버공격이라든지, 민간인 관광객에 대한 공격, 그리고 검증이 더 필요하긴 하지만, ‘천안함사건’과 ‘연평교전’에서와 같은 국지전적 도발 등의 양상이다.   이러한 일련의 행위들이 북한의 통일전선전술의 일환으로써 의도된 공격인가의 여부는 놓아두고라도, 상황이 발생한 제반 환경들을 되짚어 보면 정부의 미숙한 대응전략이 오히려 불필요한 갈등과 피해를 증폭시켜온 것은 아닌지...
Nov 26th
본색148
가난은 불편할 뿐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준은 ‘성인의 경지’다. ‘범부의 입장’에서 가난은 불편하고도 부끄러운 일(?)이다. 여기서 부끄러움이라는 말은 인격을 갖춘 개인이 현재의 가난에 대한 자신의 책임부분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는 말이다. 그렇더라도 사회가 부담해야 할 몫들에 대해서 면죄부를 준다거나 관용한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가난한 자는 부끄러움을 알지만, 부자들은 부끄러움을 잘 모른다는 사실이다. 사회의 덕을 가장 많이 보고서도 오로지 자신의 능력의 덕으로만 착각한다. 그들에게 ‘사회의 힘’을 보여주는 방법은 아마도 ‘실질적 과세의 형평’이 아닐까 싶다. ...
Nov 20th
본색147
어느 한 분야의 ‘전문가’라 함은 ‘일상 생활의 모든 현상을 자신만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고, 적용할 수 있으며, 즐길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흔히 ‘생활의 달인’이라는 사람들의 행태를 가만 보면 일의 댓가를 바라기 전에 ‘일 자체를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시래기를 말리는 일’부터 ‘우주선을 만드는 일’까지 어느 것 하나 차별없는 진기명기다. 삶을 즐기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어느 하나의 기술도 갖지 못한 개인의 무능과 더불어 실적과 경쟁위주의 조급한 사회환경, 그리고 본질적인 삶 자체의 고뇌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더라도 ‘일할...
Nov 20th
본색146
‘무기대등의 원칙’에 비추어 어느 일방의 무기가 절대적으로 대등해질 수 없다면, 결국에 이른바  ‘무기 각자 개발의 원칙’에 따라 상대방이 선택할 가능성이 농후한 최후의 무기는 과연 무엇이 될까? ‘지속가능한 삶’이란 현명한(?) 인류의 선택가능한 범위 내의 일이라고 믿고 싶지만, 지구상에 ‘핵’이 과연 사라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죽기도 어렵고, 굶기도 어렵다’며 쓸쓸히 죽어간 어느 개인의 고백이 우리 사회의 잠재된 ‘핵’처럼 느껴지는 것은 또한 무슨 까닭인가? Posted via email from 길 위의 바람 | Comment »
Nov 19th
본색145
‘은혜’를 주고 받는 관계는 개인적으로는 혜택일 수는 있을지 몰라도 사회적으로는 결코 바람직하다고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시혜적인 조치’라는 것들은 대부분 ‘은혜’를 받아야만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취약한 사람들을 구속하는 또 하나의 족쇄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른바 민주적인 선진사회에서는 구성원들이 공동체의 ‘동행’이라는 자격만으로도 ‘인간의 권리’로써 요구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져야 하고, 그런 것들을 폭넓게 충족시켜줄 수 있는 공동체로서의 국가가 이른바 ‘문화국가’로서 바람직한 모습이리라. 점점 겉만 화려한 솥을 걸어놓고 온갖 잔치를 벌이는 마당에...
Nov 19th
본색144
세상에 ‘완전’한 것은 없다. ‘완전’하다는 것은 ‘불완전’한 것들의 ‘기망’에 불과하다. 따라서 ‘불완전’한 그대로를 인식하고 받아들일 때, 오히려 인간은 가장 ‘완전’해지는 것 같다. 그러므로 ‘완전’하다는 것은 어쩌면 ‘솔직’하다는 것과 가장 일맥상통할지도 모르겠다. 부족하더라도 ‘솔직’하다면 아마 ‘불완전’한 그대로 ‘완전’해지는 첩경이리라. 어쩌면 세상의 모든 ‘기도’라는 것들은 그런 ‘고백’들이 아닐까 싶다. ...
Nov 13th
본색143
“살아간다는 것은 두 마리의 소(牛)가 끄는 달구지를 타고 가는 것과 같다.”고 한 적이 있다. 그 중 한마리는 ‘인간의 약점을 이용하는 습성을 가진 소’이고 다른 한 마리는 ‘인간의 장점을 북돋우는 습성을 가진 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나름대로 확장해석을 하자면 전자는 포괄하여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 하는 ‘악(惡)’이고, 후자는 개인보다 공동체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선(善)’으로 이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직도 인간은 인간의 제도로써 어느 하나도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지는 못하다. 다만 어느 하나의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어느 중간의 지점에서 서로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양상이며,...
Nov 6th
본색142
‘악법도 법’인 이유는 비록 현재의 악법일지라도 과거의 그 입법과정이 합리적인 최대 다수의 참여와 적법한 절차에 따라 이루어졌을 경우 그 규범의 효력을 함부로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정의(正義)는 목적이 아니라 ‘과정에의 참여이며, 절차’다. 그러므로 절차의 위법을 관용하는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공정사회’라는 것도 결국 ‘공정한 참여와 절차’를 전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적법한 과거의 내용들이 현재의 형식을 이루고, 현재의 정당한 형식들이 미래의 정의(正義)로 정의(定意)되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정의(正義)는 ‘현재...
Nov 6th
본색141
 ’먹고 사는 문제’가 차지하는 개인의 삶의 영역이란 생각보다 훨씬 광범위하다. 한때 진보진영의 정치인이 전향한 궁극의 변을 들어봐도 대개 ‘밥’을 들먹이는걸 보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국가가 개인을 위해 작용해야 할 ’먹고 사는 문제’의 핵심은 모든 사람들이 ‘최소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가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결국 ‘최소한 인간답게 먹고 사는 문제’는 헌법상 기본권인 ‘인간답게 생존할 권리’에 연결된다. 하나의 해결책이라면 ‘최대한’으로  ’먹고 사는 문제’에 필요이상으로 집착하는 사람들의 ‘탐욕을...
Nov 6th
본색140
살아간다는 것은 두 마리의 소가 끄는 달구지를 타고 가는 것과 같다. 그 두 마리 소의 마음이 맞아야 달구지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각자의 마음에도 두 마리의 소가 있을 것이며, 이 사회도 예외없이 두 마리의 소가 끌고 있는 중일 것이다. 그런데 그 중 한 마리 소의 마음도 읽지 못하면서 어찌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한탄만 할 수 있겠는가? 그 달구지에 그 소를 달아 맨 사람은 과연 누구이던가? 나아가는 방향과 습성이 아니다 싶으면 서둘러 다른 소를 찾아 나서야(尋牛) 하리라. 그것이 시행착오를 줄이는 길이라는 것을 알 정도의 댓가는 이미 치룬 것 아니던가? 아니더라도 어쩔 수 없이 당분간은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이라도 배워서 익혀야만 한다면, 그렇더라도 놓치지...
Nov 3rd
October 2010
11 posts
본색139
‘뒤집기’로 스트레스받는 것은 고구마뿐만이 아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듯이, 조용하던 사람도 뒤집으면 열받는다. 비록 필요에 따라 ‘돌려짓기’를 하더라도 제자리로 향하려는 것, 아마도 그것이 자성(自性)일지도 모르겠다. 제자리를 모른다는 것은 분명 고구마보다도 못하다는 것이다. Posted via email from 길 위의 바람 | Comment »
Oct 29th
본색138
현명한 사람들이 침묵하는 이유는 대개 말을 하게 되면 그 즉시 그르치게 됨을 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오류의 위험을 두려워만하여 지나치게 침묵만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무엇이 그르치는 것인지조차 무뎌지기 쉽상이다. 비록 오류임을 알면서도 가끔씩은 그때까지의 결론이나마 소리내야하는 이유는 무뎌진 날(刀)을 세우는 자신의 담금질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갈고 있는 대부분의 날(刀)들은 무엇보다 다름아닌 자신을 향해 있는 것이리라. Posted via email from 길 위의 바람 | Comment »
Oct 29th
본색137
현실 생활의 주된 관심사는 두가지의 화두, 즉 공동의 상생(相生)이냐 개인의 생존(서바이벌, Survival)의 문제를 떠날 수는 없는 것 같다. 대한민국의 대형 유통업계가 그들만의 생존(?)을 위해 추진하는 기업형 슈퍼마켓인 슈퍼슈퍼마켓(SSM, Super Supermarket)의 규제를 위해 재래시장주변 반경 500m 이내에 기업형 슈퍼마켓 개설을 제한하는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과 주로 재래시장주변 이외의 지역에서는 가맹점 형식의 기업형 슈퍼마켓을 사업조정 대상에 포함시키는 대·중소기업 상생협력촉진법 개정안이 표류하는 사이 대형 유통기업들은 기습 개점 등 박차를 가해 전국에 800개가 넘는 기업형 슈퍼마켓이 서둘러 들어섰다고 한다. 약삭빠른 서바이벌, 그 이후에도 기억해야 할 것은 “생존한...
Oct 29th
본색136
어느 날만 날(日)인 것이 아니라 매 순간이 대부분 직각으로 부러지는 날(日)들이며, 어느 한 사람의 일생에서도 날카로운 역사가 아닌 순간은 별로 없다. 그러나 남겨질 기록들은 거의가 잘 다듬어진 곡선이거나, 이름도 흔적도 없는 그림자 뿐일 것이다. 누가 어둠의 축제 속에 부러진 직선의 반항들을 기억이나 할까마는, 그 모난 각(角)들이 이 시대의 은밀한 탄생들을 만들어 간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흐름이란 결코 불꽃처럼 요란한 것이 아니다. Posted via email from 길 위의 바람 | Comment »
Oct 23rd
본색135
가장 강한 바람의 방향으로 기울어지는 것은 자연의 법칙(法則)이다. 그러나 뿌리 뽑히지 않고 건재하여 서 있는 것은 각자의 의지(意志)일 것이다. 땅을 떠나기 위해서는 다시 바람과 별들과 나비에 의지해야 하는 것은 완급을 조정할 수 있는 운명(運命)이다. 그러나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시간과 공간이 흐르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숙명(宿命)일지도 모르겠다. Posted via email from 길 위의 바람 | Comment »
Oct 21st
본색134
가능한 한 댓가를 적게 치르기 위해 고민하고 방황하지만, 결국엔 충분한 댓가를 치룬 결과들만 명백하다. 아직도 희미한 것들은 아마도 여전히 댓가를 치르고 있는 중이기 때문 일 것이다. Posted via email from 길 위의 바람 | Comment »
Oct 21st
본색133
때로는 너무 가까워서 생긴 일일 수도 있고, 또 때로는 너무 멀리 있어서 벌어진 일일 수도 있다. 조작 가능한 범위 내의 거리에 있지 않는 일들이 있다는 것은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인간이 아닌 다른 무엇을 부르는 소리들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Posted via email from 길 위의 바람 | Comment »
Oct 21st
본색132
누군가의 눈을 통해서 내가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일 수도 있으며, 누군가 나를 통해서 세상에 닿아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인연(因緣)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Posted via email from 길 위의 바람 | Comment »
Oct 16th
본색131
<인형의 집>을 나선 노라와, 그 이후의 행적을 궁금해 하는 이는 있을지 몰라도, 이전과 달라진 집에서 노라를 기다리는 믿음과 다시 집으로 돌아갈 용기와 희망이 노라에게 남아있는지에 대한 고민은 과연 얼마나 될까? 오늘 아니면 내일, 노라가 돌아갈 집은 과연 어디있는 것인가? 그런 집은 처음부터 존재한 적이 없으며, 아예 지을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 경계가 없다면 집도 있을 수 없는 것이 아닐까? Posted via email from 길 위의 바람 | Comment »
Oct 16th
본색130
그림의 떡(畵中之餠)조차도 내가 그린 그림이라면 그것을 먹지 못함에 누굴 탓하겠는가? Posted via email from 길 위의 바람 | Comment »
Oct 8th
본색129
인생은 파도타기와 같다. 아무리 높은 파고의 위세도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포말로 변하고야 마는 숙명을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는 없다. 해변의 모래 위에서 스러져갈 때에도 땅속이나 하늘로 오르지 못한 운명은 다시 되풀이해서 파도를 타야 한다. 윤회의 업(業)처럼 고해의 바다에서 끊임없이 돌고 또 맴돌아야 한다. 유일하게 벗어나는 방법이란 오직 그러한 존재의 사실을 실상(實相) 그대로 인식하고 바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解脫)뿐일 것이리라. 비워낼수만 있다면 좀 더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더 높은 파도를 즐기며 탈 수도 있을 것이다. 바람따라 흔들리는 매일의 일상이 바로 수행의 시험 그 자체일 것이며, 해탈은 때가 되면 저절로 익어서 고개를 숙이는 기쁜 하심(下心)일 것이다. 오늘은 또 어떤...
Oct 8th
August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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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색128
눈(眼)이 두 개인 것은 하나가 보지 못하는 것을 다른 하나로 보게 하거나 균형을 잡기 위함일 것이며, 귀(耳)가 두 개인 것도 하나로 듣지 못하는 것을 다른 하나로 듣게 하거나 역시 균형을 잡기 위함일 것이며, 코(鼻)가 두 개인 것도 마찬가지로 하나로 맡지 못하는 것을 다른 하나로 맡게 하거나 또한 균형을 잡기 위함일 것이다. 또한 사람의 팔다리가 각각 두 개인 것도 한쪽이 하지 못하는 것을 다른 한 쪽이 보완하거나 제대로 서 있게 하기 위한 균형을 위함일 것이다. ‘경제’라는 것이 추구하는 개인적 이익들을 조정하고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 보편적 이익을 위한 ‘복지’라는 것이 뒤따라야 할 것이며, 보수와 진보라는 서로 다른 가치의 소통과 균형을 위해서 또한...
Aug 9th
본색127
한여름밤의 소낙비가 바람을 몰고 간 어느 새벽, 늘 오르던 등산로를 가로질러 큰 거목 하나가 쓰러져 있었다. 혼자 치우기는 버거워 위로 뛰어 넘을까, 밑으로 기어 갈까를 망설이다 옆으로 샐 수 있는 틈을 발견하고서는 교묘하게 돌아서 갔다. 그런데 어느날 그 고목이 흔적도 없이 치워져 있다. 누군가가 뛰어 넘지도 못하고, 기어가지도 못하고, 돌아가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치워준 것이리라. 자신의 입장만을 생각한 나는 악(惡)에 불과한데, 다른 사람을 배려한 그 누군가는 분명 선(善)이다. 비록 자신의 한 몸 밖에 생각지 못하는 악(惡)한 나지만, 알게 모르게 선(善)한 이들의 보이지 않는 그늘 덕에 무사하다. 늘 감사할 뿐이다. Posted via email from 길 위의...
Aug 5th